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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usVirus의 BlarBlar

잠시 멈추고 돌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 – 새벽 버스를 타고 정동진에 다녀오던 어느 날

자유롭고 싶다

 

평범하고 싶었지만 평범하지 않았던 저, 윤진기는 언제부턴가 평범함을 포기하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역시 자유롭고 싶은 사람입니다.

 

어려서부터 지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부모님은 누구에게든 이기길 바라셨습니다. 동생과의 경쟁에서도 이기길 바라셨던 아버지는 어린 저에게는 넘어서야만 하는 존재였습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몸부림치던 14살의 는 중학교에 입학한 후 전교 1등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고, 또한 운동도 꽤나 잘해 육상부, 야구부, 싸이클부 등등에서 스카우트 1순위였던 아이었습니다. 하지만 방과 후에는 친구들과 노래방가기를 즐기고 흔히 말하는 못된 아이들과 어울려 부모님을 곤란하게 만들었던 적도 종종 있었습니다.

 

이처럼 경쟁에 익숙해진’ 18살의 여름의 어느 날, 저는 자신에게 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네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뭐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지금도 진행형입니다만은 일류대학, 일류학과가 아닌 천천히 하더라도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을 찾고 나서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하자는 결론에 이르렀고, 저는 학교를 그만두고 자유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2년이 조금 넘게 혼자 있는 시간을 보내고 나서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여러 나라의 문화를 알고 물건을 사고파는 거상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고, 좀 더 전문적인 지식을 쌓기 위해 경영학을 하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들보다 일 년 늦은 나이에 연세대학교 자유전공에 입학해 현재 병역의 의무를 마친 후 경영학과에 재학 중입니다.

 

인종, 성별, 나이, 가치관 등등에 무관하게 모든 사람들에게는 배울 것이 있고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론 40살이 넘는 선생님과 친구가 되어 산과 들로 사진을 찍으며 놀러 다니고, 때론 세계 각지에서 온 친구들에게 한글의 전도사가 되기도 하고, 흔히 말하는 여자친구와 여의도 공원에서 산책도 하는 그런 즐겁고 또 자유로운 사람이기에, 저와 한 학기동안 어떤 식으로든 상호작용을 할 김진욱 교수님께도 한마디 드리고 싶습니다.

 

저의 친구가 되어 주시렵니까?”

잠시 멈추고 돌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 새벽 버스를 타고 정동진에 다녀오던 어느 날

 

뒷북이지만 얼마 전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에 대한 동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영상의 주된 내용은 미국의 주택담보대출의 건전성이 무너짐에 따라 세계 각지에서 이에 연관된 파생상품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심지어 대한민국 어느 농촌에서 농사로 생업을 잇는 할머니까지)이 손해를 봤고, 이는 금융에 대한 지식이 조금만 있었더라도 막을 수 있었던 일이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겨우 학부 2학년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영상의 본래 의도대로 해석이 되지 않고 왜 우리는 이런 사소한 금융 파생상품에까지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지금 선진국이거나 선진국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는 대부분의 국가들의 롤모델은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 선진국가들이다. 이런 사대주의의 결과는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사태에서 우리나라의 아무것도 모르는 할머니들이 피땀 흘려 모은 그들의 모든 것을 앗아가는 비참한 결과로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다.

 

나의 절친한 친구 중 외국에서 꽤 오랜 시간을 지낸 Chris Kang(한국명 강민호)이라는 녀석이 있다. 최근 이 친구를 통해 알게 된 꽤 많은 외국친구들을 보고 있노라면 굉장히 특이한 것이 하나 있는데, 특히 영어권 국가 사람일수록 한국에 얼마나 오랜 시간을 머무르든 간에 한국말이 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어를 배우지 않더라도 불편함을 별로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좋게 말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영어구사력이 매우 높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미국 또는 서양문화권에 대한 사대주의가 이런 형태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런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한국에 한국말을 배우러 왔으면 최대한 한국어를 쓰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고 국어 전도사를 자청하지만 한 학기 또는 일 년의 서울생활을 마치고 돌아가는 그네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의 경우 탈 아시아를 외치며 그들은 극동아시아가 아니라 극서에 위치한 ‘Japan’이라고 구분 짓기를 원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나는 처음 그 글을 읽은 뒤에는 일본이 아시아의 한 국가가 아니라 세계 속의 주체적인 일본으로서 우뚝 서기 위해 그런 말을 한 줄 알고 마음속으로 박수를 쳤다가 이내 후회한 적이 있다. 그들이 말하는 내용의 요지는 일본처럼 근대화된 나라가 아시아에 속하기 싫다는 것이었다. 그들 역시 세계 속의 일본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속의 서양에 불과한 나라인 것이다.

 

과연 이런 무조건적인 추종의 결말은 해피엔딩일까? 세계화가 되고 보편적인 가치에 대한 충분한 공감과 함께 절대적인 진리인 양, 더 빠르고 더 멋지고 더 크고 더 찬란한 문화를 향유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글쎄, 내 생각엔 아닌 것 같다. 매년마다 미세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 100% 신뢰할 수는 없지만 상위권에는 근대화와는 거리가 먼 국가들이 위치하고 있다. 2012NEF 행복지수에서 근대화의 상징인 미국은 105위를 차지하였다는 것만 봐도 근대화=행복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집안 형편상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흔히 말하는 아르바이트(part time job)4개나 하면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 이렇게 열심히 돈을 벌어 맛있는 것도 사먹고 예쁜 옷을 사 입는 것도 좋지만, 올해 들어 가장 행복했던 날은 다른 날이 아니라 함께 있으면 즐거운 사람과 함께 정동진에 가서 해변을 거닐었던 저번 주 토요일 오전이었던 것 같다. 자연을 즐기면서 바닷가에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걸으면서 물장구도 치고 바닷물에 발도 담그면서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두던 그 시간은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무조건적인 서구화, 풍족함에 목마른 사람들이여. 하나만 묻고 싶다. 잠시 멈춰서 자연과 함께, 마음 맞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시간을 보낸 적 있느냐고.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아냐고 말이다.